🏛️ #11. 세밀함이 뛰어나 가히 귀하다 할 수 있다.

2022. 5. 5.

2022. 05. 06(금)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 1334, 34.0x11.5, 보물 752호, 호림박물관

세밀함이 뛰어나 가히 귀하다 할 수 있다.

사경은 경전을 손으로 베껴 쓴 것을 의미합니다. 본래 목적은 부처님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기 위함이었지만, 목판 및 금속활자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점차 자기 수련, 공덕을 쌓기 위함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도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를 제작하기 전까지 성직자들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성경 필사였다고 하죠. 당시만 해도 종교, 문학, 예술 등 고차원의 지식 활동을 종교인들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 필사와 같은 중요한 일은 성직자가 직접 했습니다. 라틴어, 그리스어를 학습 가능한 계층도 이들 뿐이었고 말이죠.

우리나라의 경우는 불교가 개국부터 멸망까지 내내 국교였던 왕조는 고려가 유일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 사경을 하는 것 자체가 국가 사업인 경우가 많았는데 왕실 발원 혹은 귀족 발원에 의한 사업인 만큼 어느 때보다 정성껏 임했을 테지요. 종이의 재료가 되는 닥나무도 정성들여 키우고, 사경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수련하는 자세로 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경을 하다가 화장실이라도 가게 되면 다시 목욕하고, 향수를 뿌리고 와서 다시 했을 정도였죠. 제작하는 와중에 글씨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썼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렇듯 사경 제작이라는 건 실력을 떠나 정말 종교의 힘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예술품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고려불화도 그렇지만 사경들을 보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 없이 그 치밀함에 넋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문양이 빼곡히 들어간 상감청자도 그렇고 고려시대는 확실히 미감이 조선시대와 달랐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불교 국가여서 “종교의 힘으로! 불심을 다하여!”라며 작품 제작에 임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왕실 후원금도 차원이 달랐을테고요.

몇 년 전에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세밀가귀》 전시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미술이 통념과는 다르게 디테일에 강하고 치밀하며, 핍진하다는 점을 잘 보여줘서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는 전시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세밀가귀(細密可貴)’가 가장 잘 발현된 작품으로 당연히 사경이 포함되죠. 한국미술의 여러 특징 중 하나를 잘 포착했던 전시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밀가귀’라는 말이 지닌 의미는 당시 리움에서 소개한 전시 서문이 잘 표현한 것 같아 소개해 드립니다.

▶ 세밀가귀(細密可貴)

‘세밀가귀’는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나오는 말로 중국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의 나전을 보고 “세밀함이 뛰어나 가히 귀하다 할 수 있다.”라 기록한 것이다. 이는 12세기 찬란했던 고려의 문화, 넓게는 한국미술의 역사에 이어져 온 ‘세밀함’, ‘섬세함’, ‘정교함’이라는 특징 전반에 적용될 수 있다.

왼쪽 네임택이 풀어 쓴 '쉬운 글'이고, 오른쪽 네임택은 일반적인 설명문입니다.

미술에서 쉬운 글이란 무엇인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시적 소장품》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쉬운 글’로 해설한 작품을 본래의 설명문과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는 데 있습니다. 쉬운 글로 해설했다고 해서 작품 설명들을 모두 읽어 봤는데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대한 씁쓸함이 아니라 미술계 전시 풍토에 대한 씁쓸함이었습니다.

전시 서문에 밝힌대로 쉬운 글로써 발달장애인을 배려하고, 대중의 미술 접근성을 높이겠다고 했지만 이러한 목표를 떠나 원래, 당연히 이렇게 해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무슨 말인지 한참을 읽어보고 곱씹어 봐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쓰다가 이렇게 ‘특별히’ 대중을 배려하는 이벤트를 열어서 쉬운 글로 설명하겠다는 점이 잘 이해되지 않더라구요. 전시는 본래 전공자들끼리의 이벤트가 아니라, 지역 사회와 시민을 위한 교육의 성격이 기본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어려운 전문 용어를 많이 써야 학술적이고,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전시가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전시의 주제를 설정할 때 기존 인식과 다른 해석을 보여주고, 출품작을 선별할 때 충분한 근거를 갖고 학계의 통념과 다르게 한다면 충분히 학문에 기여하는 전시가 될 수 있습니다. 작품 설명을 쉽게 풀어쓴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본래 설명문 중에 “다소 기이한 모습으로 가장한 신체를 통해 작가는 일상에서 포착되는 추상적인 내면의 감정을 더욱 극적으로 강조한다.”는 문장은 쉽게 와닿지 못하고 머리 주위에서 겉도는 느낌이 듭니다. 모래알을 겨우 한 움큼 쥐었는데 옆으로 다 새버리는 듯한 느낌입니다. 작품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한 관람객이 거꾸로 문장을 해석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거죠. 아마 “기이한 형태의 신체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흔히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들을 극적으로 떠올릴 수 있게 해준다”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별다른 의식없이 모두가 습관적으로 하고 있을 때 전환의 계기를 만드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므로 이번 전시의 취지는 좋았습니다. 점차 편안한 글로 해설해주는 전시가 많아지긴 할텐데 그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박물관들이 전시에서 작품명을 쓸 때 <백자청화운룡문호>, 이런 식으로 써왔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을 필두로 점차 <백자 청화 구름 용무늬 항아리>라고 풀어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이 변화를 처음 접했을 때 ‘아 이렇게 쓰니까 훨씬 좋구나’라며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현대미술 역시 이 전시를 계기로 이해하기 쉬운 글로 설명을 해주는 전시가 점점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수원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뒷 이야기

커뮤니티에서 우연히 보게 된 이미지인데 무척 재미있어서 가져왔습니다. 수원 화성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문화유산의 가치를 떠나 산책로로도 아주 좋은 장소여서 가게 되면 느긋한 마음이 절로 생기는 곳이기도 합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뒷 이야기는 몰랐는데 기록의 나라, 의궤의 나라인 조선의 유적답게 기록이 큰 힘이 되었더라구요.

밑의 이미지는 재미 차원에서 가볍게 보시고, 수원 화성의 가치에 대해서는 아래에 있는 유튜브 영상으로 보시면 좋겠습니다 :)

▶ 유튜브 영상

News

1. [국립현대미술관] 히토 슈타이얼, 전쟁·팬데믹 속 미술관의 역할을 말하다.

▶ 원문 읽기

2. 해외 미술거장 몰려드는 서울. 뉴욕이 안 부럽다.

▶ 원문 읽기

3. 예술과 일상 경계 허물다…울산시립미술관 두번째 특별전

정연두의 신작 <오감도(烏瞰圖)> 최초 공개

▶ 원문 읽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편이 남도인 이유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전 장관이 유홍준 교수에게 전화해서 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전라남도(해남, 강진 등)부터 시작하셨는지 물은 적이 있다는 내용을 봤습니다. 그 책은 제가 중학교 올라갈 때쯤엔가 아버지가 읽어보라며 빌려주셔서 읽게 된 책이기도 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말씀하셨죠.

“사람이 좌파이긴 한데 책은 아주 좋아. 읽어봐.”라구요. ㅎㅎ 저에게는 당시에 어릴 때여서 잘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아버지의 정치 성향이 어땠는지를 감지할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암튼 유시민 장관의 저 질문에 대한 유홍준 교수님의 대답은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교수님은 대도시 중심의 국토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싶었고, 영남대 교수였던 시절에 영남대 학생들을 데리고 호남의 남도로 감으로써 문화유산을 통해 영호남의 지역 갈등을 해소하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나는 왜 공부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습관처럼 말하지만 정작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학문의 실천’이란 무엇인지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왜 공부하는가. 직장인으로서 결재 문서 쓰듯이 학문을 대하진 않았는가. 다시 고민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이런 소소한 깨달음 덕분에 저는 다큐멘터리를 무척 좋아합니다. 자칫 박제화될 수 있는 전공 지식이 방송 매체를 통해 생기를 얻게 되고, 이를 통해 공부 의욕이라는 것을 다시 샘솟게 해주거든요.

어제 쉬고 오늘 하루만 버티면 되는 징검다리 주말입니다. 어쩌면 오늘 연차를 내서 연이어 쉬는 분도 계시겠네요.

연휴 편히 쉬시고요.

감사합니다.

이장훈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