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5일 포항에 지진이 크게 났을 때 저는 다음 해에 개최할 예정이었던 전시를 준비하러 신림동에 있는 본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수장고가 본관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날 지진이 더 올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급하게 신사동 분관에서 전시 중이었던 모든 작품들의 안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넘어왔습니다. 도자기들은 낚시줄로 모두 고정했고 회화 작품들은 와이어가 제대로 고정되어 있는지 살펴봤죠. 다른 학예사들과 이 작업을 하면서 어지간한 지진이면 괜찮긴 할 거다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박물관 건물이 강남구에서 재난발생시 긴급대피소로 지정될 정도로 내진 설계가 잘 돼있었거든요. 이렇듯 가만히 생각해보면 박물관은 식량만 없을 뿐이지 각종 재난을 버티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 같습니다.

박물관은 르네상스 이후 특이한 것, 이국적인 것들을 모아놓는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y)’에서 왕실 권위에 의해 선별된 아름다운 것을 회랑(복도)에 배열하는 ‘갤러리(Gallery)’ 형태를 지나 이제는 지역사회에 여러 방면으로 기여하는 공간으로 성격이 변모해왔습니다. 작품을 수집하고 연구하여 전시를 통해 지역사회 교육에 일조하는 개념에서 더 발전한 겁니다. 이를 앞장 서서 개념을 만들고 실천하는 국가는 미국인데 재난 관련해서 아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아래 글은 엘리자베스 메릿(미국박물관연맹 미래박물관센터 창립이사 겸 미래전략팀 부사장)이 기고한 「지역 커뮤니티 시설로서의 박물관」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박물관학이라는 학문이 생길 정도로 물리적인 공간에 철학이 덧입혀진지 오래인데 한 번 더 개념이 진화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 2018년 2월 18일 일요일 이른 아침, 필라델피아에 새로 개관한 미국혁명박물관(Museum of the American Revolution) 길 바로 맞은편 아파트에서 4단계 경보 화재가 발생했다. 불길이 거세지자, 인근 호텔에 있던 주민과 투숙객은 매서운 추위 속에 밖으로 대피했다. 소방서장의 요청에 따라, 박물관을 수십 명의 난민에게 개방하여 난민이 따뜻하게 지내며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했고, 난민에게 물을 제공했다.

• 2021년 2월에는 북극의 영향으로 텍사스에 기록적인 한파가 덮쳤고 주 전체가 정전되었다. 전력망이 불안정해지자, 거의 3백만 가구가 난방 없이 지내야 했고, 파이프가 터져 많은 가구는 물 공급도 끊겼다. 매캘런에서는 국제 예술 문화 박물관(International Museum of Art and Culture)은 빠르게 주간 한파 쉼터(warming center)로 전환하였고 3일 동안 입장료를 받지 않고, 일하고, 공부하고, 전자 기기를 충전하는 사람을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는 공간을 마련했다.

• 캘리포니아에서 주정부 법규는 주 또는 군 박물관 직원을 포함한 모든 고용인을 ‘자연적으로 발생하거나, 인간으로 인해 발생하거나, 전쟁으로 인한 비상사태’ 대응 시 재난 업무 종사자로 소집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샌 버너디노 카운티 박물관(San Bernardino County Museum) 직원 대다수는 박물관이 대중에게 폐쇄한 동안 지역사회에 임시직으로 재배치되었다. 그 직원의 임무는 현지 병원에서 접촉 추적자로 일하는 것과 여론 조사원과 운전기사로 2020년 11월 선거를 지원하는 것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