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구식에 담겨 있는 문화의 본질

2022. 6. 23.

2022. 06. 24(금)

한국 영화가 쓰는 '새로운 보편'의 길

1. 세계 수위로 인정받는 칸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다시 상을 받았다. 5월17일 개막한 제75회 칸 영화제는 〈헤어질 결심〉(박찬욱 감독)에 감독상, 〈브로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 남우주연상(송강호)을 수여했다. 2019년 〈기생충〉(봉준호 감독)의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3년 만이다. 한국은 칸 영화제 경쟁부문의 모든 상을 받은 국가가 되었다.

2. ‘한국 영화가 세계 수준을 따라잡았다’는 평가가 아니라, ‘할리우드와 다른 새로운 조류를 이끌고 있다’는 평이 있다.

3. 그러나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황금종려상을 <헤어진 결심>이 아닌 다른 영화에 수여한 것을 두고 ‘칸의 실수’라고 했다. “(황금종려상을 탄) 〈트라이앵글 오브 새드니스〉(루벤 외스틀룬드 감독)가 나쁜 영화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헤어질 결심〉은 화두를 던진 영화다. 영화 만듦새를 다듬을 수는 있지만 화두를 던지는 건 아무 감독이나 할 수 없다.”

4. 영국의 대표적인 영화평론가 피터 브래드쇼는 황금종려상 수상작에 부족한 새로움이 〈헤어질 결심〉에는 충만하다는 이유로 “내가 꼽은 개인적 황금종려상은 〈헤어질 결심〉”라고 했다. “긴장감과 음모, 거대한 감정의 대립, (…) 플롯 비틀기는 매우 히치콕적이다.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대다수 경우와 달리 (〈헤어질 결심〉은) 모작(pastiche)이 아니다. 마치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만든 히치콕 스타일 영화 같다.”, “새로운 캐릭터와 신선한 전개가 주기적으로 관객을 때리고 균형을 잃게 한다. 극중 인물의 관계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이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관객은 기다려야 한다.”

할리우드 영화에 결여된 미덕 갖췄다

5. 박찬욱 감독은 5월24일 상영 현장에서 “길고 지루하고 구식인 영화를 환영해줘서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6. 이를 두고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구식’이란 표현은 고전적이고 전통적이란 의미다. 〈헤어질 결심〉은 모든 게 디지털화되고 가벼워지는 시대에, 질(quality)을 추구하기 위해 한번 멈춰 서서 돌아보자는 화두를 던진다. ‘영화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영화다”라며 박 감독의 메시지야말로 칸 영화제의 정신과 가장 어울린다고 했다.

7. 영국 주간지 〈옵서버〉는 지난해 6월19일 ‘새로운 할리우드 : 대한민국 영화는 신선하게 독창적이고 장르를 뒤흔든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이 매체는 한국이 영화의 본질에 충실한 작품을 꾸준히 생산해낸다고 평했다. 그리고 미적 즐거움, 감정적 매혹, 잘 쓰인 각본 등을 한국 영화의 강점으로 꼽았다.

8. 한국 영화가 할리우드를 뒤쫓는 걸 넘어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는 평가는 서구권 밖에서도 나온다. 인도의 영화평론 사이트 〈바라드와즈 랑간〉는 지금의 한국 영화와 1980~90년대 할리우드 영화 간 공통점으로 ‘인간의 쓰임새’를 꼽는다. “(현재 할리우드 영화에서) 인간은 “액션 장면 사이에 들어가는 충전재로 소비되지만, 한국 영화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는다.”고 평했다.

미묘한 관계 묘사에 능한 한국 영화

9. 액션과 CG에만 치중하게 된 지금의 미국 영화보다는, 미국의 길을 모델로 삼은 성실한 수제자 한국이 할리우드의 황금기에 가깝게 되었다.

10.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한국 대중문화 작품은 사람 사이의 미묘한 관계 변화를 묘사하는 데 능하다. 주먹을 내질러도 주먹질하는 사람의 심경에 집중한다. 심지어 좀비나 자연재해를 다루면서도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끈질기게 파고든다”라고 말했다.

11. “서구권에 비해 여러 가족 구성원과 부대끼며 살아온 전통이 오래 유지됐다. 쉽사리 풀리지 않는 관계라는 주제를 오래 생각하게 된 계기일 수 있다.” 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송강호가 지금껏 해온 연기 또한 ‘관계’를 포착하는 능력에서 나온다고 그는 본다.

12. 박찬욱 감독은 시상식 후 “한국 관객들이 웬만한 영화에는 만족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내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국 영화는 장르를 비틀고 주제를 뒤흔들었다.

13. (한국 영화는) ‘인간’, ‘관계’, ‘공동체’ 등 국내 관객이 선호하는 고유의 가치를 담았다. 처절한 경쟁 과정에서 이 표현은 극단까지 벼려졌다. 정서가 과하면 신파라고 비판받았고, 모자라면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렇게 담금질하던 어느 날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보다 더 할리우드 같은 새로운 보편이라고 평가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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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시》 페어를 보고 / 문화역서울284

학부생이던 시절, 그러니까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미술사 교수님들께 종종 들었던 말씀 중에 하나가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가 되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저변이 넓어질 것이다”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블록버스터 전시에만 몰리는 과열 현상을 보이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각자 자기 취향에 맞춰서 즐길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분산될 것이다”라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미국, 일본 등에서도 2, 30년 전에는 인상파 거장전, 르네상스 미술전, 루브르박물관전 등과 같은 거창한 전시 위주로 관람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다양화되고, 개인화된 양상을 띠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해주시던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우리나라 역시 인상주의를 비롯한 각종 거장전, 박물관전 등이 한창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과도기적이므로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문화와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 자연스레 해결될 거라고 하셨죠. 저도 어떻게 변화될 지 꽤 궁금했습니다. 언제쯤이면 변화된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을까라며 막연한 기대감을 품은 채 잠시 기억에 묻어뒀죠.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그 날이 온 것 같습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앞에 긴 줄을 선 채 입장을 기다리던 인상주의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한창을 기다려 표를 사서 들어간 폴 고갱전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런 풍경이 사라졌더라구요. 물론 2010년 이후 일상화된 스마트폰 덕분에 예매 방식이 간편해진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이 못지 않게 취향이 다양화된 시대가 온 듯합니다.

세계적인 거장의 특별전을 하게 되면 현재 이건희 기증품 전시처럼 예매 전쟁과 대기줄은 여전히 길게 서겠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볼거리가 풍부하여 각자의 취향대로 전시를 보러 다니는 요즘입니다. 문화라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어서 그 변화를 감지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예민한 감각과 탄탄한 이론을 갖고 있어야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말없이 흘러가버리듯 문화도 스며들듯이 변화하는 것일테니까요. 그래서 저도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시대가 변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 문화역서울284 본관에서 ⟪그림도시⟫라는 아트페어 대관 전시가 열렸습니다. 그 옆에서 제 전시를 하고 있어서 어떤가 하고 둘러봤습니다. 이런 아트페어가 있는지 몰라서 내용이 궁금했거든요. 미술과 대중의 접점을 좁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 페어였습니다. 관람객과 작가가 직접 소통할 수 있도록 기성 갤러리가 아니라 작가가 직접 부스를 마련해서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고 홍보하는 장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작가, 신진 작가들이 주를 이루었고 2층에서는 독립출판 작가들의 부스도 있었습니다. 관람객들이 직접 작가와 대화하며 작가의 작품 세계를 그 자리에서 이해하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사는 모습이 신선했습니다. 얼핏 디자인 페어로 보일 정도로 디자인 상품 판매 장터처럼 보이기도 했죠.

이 페어를 보면서 제가 놀랐던 점은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관람객의 연령층이 굉장히 젊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작가들이 전부였다는 점입니다. 제가 현대미술은 아무래도 잘 모르기에 저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젊은 신진 작가가 많더라구요. 그런데 언제, 어디서 팬들과 소통을 해왔는지 관람객들의 인기가 상당한 작가들이 많았습니다.

이를 두고 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제는 주류, 비주류라는 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예술을 펼치는 작가들이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굳이 주류에 편승하지 않더라도 이에 호응해주는 팬들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이 많아진 듯합니다. 문화의 다양성이 풍부해진 때가 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2008년 소소하게 시작한 독립출판 북페어인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면서 출판사를 굳이 끼지 않아도 자신의 책을 만들어 파는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에 신기하다, 재기발랄한 사람들 많네 정도로 보고 넘긴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러한 분위기가 미술계로도 넘어와서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한 것 같아요. 20여 년 전에 교수님들께서 말씀해주신 시대가 드디어 도래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Book] 우현 고유섭, 『구수한 큰맛』

6월 26일(일)에 인천 중구에 있는 <고유섭 기념비> 앞에서 우현 고유섭의 78주기 추도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현 고유섭(1905-1944)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보통 ‘한국미학의 선구자',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자'라고 부릅니다. 무려 29세에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한 인물이었고 한국 미술사학계를 일군 원로 학자인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 이른바 ‘개성 3인방’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고유섭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에서 미학, 미술사를 공부했습니다. 서구에서 시작된 이 학문들을 공부하며 방법론을 익혔고, 이를 통해 한국의 미술을 연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한국미술사가 생긴 것입니다. 전근대에도 우리 미술에 대한 여러 기록과 비평은 당연히 있었지만, 보편화된 연구방법론을 통해 ‘미술사(Art History)’라는 학문으로 처음 정립한 분이 우현 고유섭이죠.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등 무심하되 반전의 매력이 있다는 식의 용어를 접하신 적이 있을 겁니다. 이 용어로 한국미술의 특질을 규정하신 것도 우현 고유섭입니다. 예전 뉴스레터에서 소개해드린 바 있는 ‘세밀가귀'라는 용어도 한국미술의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듯이 이제는 조금 조정이 필요한 이론이긴 합니다. 5천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제작된 수 많은 미술품을 하나의 말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런 부분은 그의 연구 업적에 비하면 정말 사소한 트집잡기에 불과할 겁니다. 그만큼 현재 미술사학 발전에 끼친 영향은 방대하며 적확한 관점이 많거든요.

학부 4학년 때 전공수업에서 고유섭의 『구수한 큰맛』을 발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챕터별로 나누어서 한 주제씩 발제하고, 현재의 관점과 비교하여 발표하는 수업이었는데 저는 지금도 이때 미술사 공부가 가장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전까지는 역사를 공부하고 그 시대의 주요 작가와 작품을 분석해서 외우고 슬라이드 시험을 보는 수업을 주로 들었기 때문에 생각의 깊이에 신경쓰기보다 암기하기에 급급했거든요. 그러다가 이 수업에서 고유섭의 문장을 뜯어보고, 다른 자료들을 찾아 현재의 이론과 비교하면서 생각이 깊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맛도 이때 처음 알게 되었죠. 이 수업에서 발표했던 레포트는 지금 보면 많이 어설프지만 당시엔 최선이었고 추억이기에 아직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름 제 공부의 첫 걸음처럼 느껴지더라구요.

한국미술사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생각을 하고, 문장을 음미하며 한국성에 대해 탐구하고 싶다면 고유섭의 『구수한 큰맛』을 추천드립니다. 문장 구조가 지금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현대어로 많이 번역해놔서 이해하시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읽어 보시면 우현 고유섭의 천재성에도 크게 감탄하게 되실거에요. 10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미술사 연구가 질적, 양적 성장을 크게 이루었는데도 고유섭이 주장한 논점이 여전히 유효한 게 많거든요. 더구나 그 글을 쓸 당시에 그의 나이가 2, 30대였다는 게 다시 생각해봐도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미술은 시각이 보내는 초대장

1. 미술 경험은 전문 지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눈으로 보는 것이 먼저다. 음식에 대해 모르더라도 먹어보면 맛을 아는 것과 같다. 메뉴판에 자세하고 멋지게 쓰여진 설명을 봐야만 맛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맛을 느끼면서 또는 맛을 느낀 뒤 음식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이 훨씬 좋다.

2. 미술도 마찬가지다. 미술사나 미술이론에 관해 해박한 지식이 없어도 미술을 즐길 수 있다. 더구나 사전 지식이 미술 경험을 훼방 놓을 때가 종종 있다.

3. 많은 현대인들은 미술에 대한 지식이 시각보다 어쩐지 우위에 있는 고급 능력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시각 체계는 언어가 생기기 전부터 수천만년에 걸친 진화 과정을 통해 인류가 습득하며 갈고 닦은 능력이다.

4. 사람의 미소가 나에 대한 친근함의 표현인지, 아니면 비웃음이나 노여움을 위장한 것인지도 얼굴 표정을 보면서 식별해야 한다. 인간의 시각은 대상을 보고 소화하고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뇌 능력으로 진화되었다.

5. 미술은 이러한 고차원의 복합적 시각 경험에 기반한다. 미술 작품을 구성하는 색, 형태, 질감(texture), 구조, 뉘앙스 등은 눈을 통하여 들어와서 뇌의 시각 체계를 자극한다.

6. 미술가들은 시각 경험을 둘러싼 이 위대한 비밀을 보통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그림이나 조각에 옮겨 보려고 애쓴다. 훌륭한 미술 작품은 감각과 생각을 응축적으로 자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7.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미술 작품을 보면 피곤하고 소진된 뇌를 깨우는 한잔의 커피처럼 색다른 원기가 마음에 퍼진다. 미술은 당신의 시각이 당신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다. 지식의 눈치를 보지 말고, 인류의 시각 능력에 자부심을 갖고 미술을 보자.(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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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urator’s Note

저는 미술감상법으로 “본인이 느끼는 게 답이다”는 류의 대답을 조금 꺼리는 편입니다. 최소한 미술사 연구자는 그렇게 대답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직무유기 같달까요? 알지 못하면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니라”처럼 될테니까요. 그러나 어렵고 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인 것도 맞기 때문에 종종 이 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볼 수 있어야 알 수 있고 알아야 비로소 좋은지, 싫은지 취향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만, 이 글을 보니 어쩌면 그냥 순수하게 느낄 수 있도록 권유해야 될 때도 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